협박·주거침입·명예훼손, 형사 처벌 없어도 민사 책임 묻는 방법
2025. 10. 27.

217번 조회된 인터넷 글
의뢰인이 사무실에 오셨을 때 가장 먼저 꺼낸 말은 이거였습니다.
형사고소했는데 불기소됐어요.
2022년 2월, 상대방은 인터넷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습니다. 의뢰인을 방과후 교사로 지목하며 불륜을 저질렀다고 적었습니다. 나체 사진을 주고받았다고 했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칠 자격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의뢰인은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습니다. 하지만 검찰은 불기소 결정을 내렸습니다.
피해자가 특정되지 않았다는 이유였습니다. 조회수가 217회밖에 안 되고, 댓글도 없어서 불특정 다수에게 알려질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했습니다.
의뢰인은 물었습니다. 그럼 끝인가요?
저는 답했습니다. 아니요, 이제 시작입니다.
형사와 민사는 다릅니다
많은 분들이 착각하시는 게 있습니다. 형사에서 처벌받지 않으면 민사에서도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그렇지 않습니다.
형사소송과 민사소송은 목적부터 다릅니다. 형사는 국가가 범죄자를 처벌하는 절차입니다. 민사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손해배상을 받는 절차입니다.
증명의 수준도 다릅니다.
형사에서는 합리적 의심을 넘어서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99% 확신이 들어도 1%의 의심이 남으면 무죄입니다. 하지만 민사에서는 그보다 낮은 증명으로 충분합니다. 개연성이 더 높다고 판단되면 책임을 인정합니다.
판단 기준도 다릅니다.
형사에서 무죄나 불기소되었다고 해서, 민사에서도 책임이 없는 건 아닙니다. 같은 행위를 두고 형사에서는 범죄가 아니라고 봤지만, 민사에서는 불법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의뢰인의 사건이 딱 그런 경우였습니다.
협박, 주거침입, 그리고 명예훼손
의뢰인이 겪은 일을 정리했습니다.
2021년 11월, 상대방은 의뢰인에게 하루 동안 15개가 넘는 협박 문자를 보냈습니다. 의뢰인의 직장, 남편, 딸을 거론하며 교육청에 신고하겠다고 했습니다. 학교에 찾아가겠다고 했습니다. 가족들을 다 찾아내겠다고 했습니다. 이 문자들로 상대방은 정보통신망법 위반으로 벌금 100만 원을 받았습니다.
같은 시기, 상대방은 두 차례 의뢰인의 집까지 찾아왔습니다. 한 번은 혼자, 한 번은 다른 사람과 함께 왔습니다. 현관 벨을 2분간 누르고, 우편물함을 열어 남편 명의 신용카드를 가져갔습니다. 함께 온 사람은 주거침입과 재물손괴로 벌금 100만 원을 받았습니다.
2022년 2월, 상대방은 인터넷에 의뢰인을 지목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의뢰인의 동료가 이 글을 보고 연락했습니다. 의뢰인이 근무하던 학교는 수강생 부족을 이유로 방과후 수업을 폐강했습니다. 명예훼손 고소는 불기소되었습니다.
2022년 5월, 상대방은 의뢰인이 일하는 다른 학교에 직접 찾아가 교감선생님에게 의뢰인의 사생활을 얘기했습니다.
상대방은 의뢰인을 상대로 3천만 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의뢰인이 불륜으로 자신의 사실혼 관계를 파괴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반소로 맞서다
의뢰인을 공격한 본소 소송에 맞서 반소를 제기했습니다.
협박은 이미 형사처벌이 확정되었습니다. 이 부분은 민사에서도 당연히 불법행위로 인정됩니다.
주거침입은 함께 온 사람만 처벌받았지만, 상대방도 두 차례나 집까지 왔습니다. 형사고소되지 않았다고 해서 민사상 불법행위가 아닌 건 아닙니다.
명예훼손이 핵심이었습니다.
형사에서는 피해자 특정이 안 되었다고 불기소했습니다. 하지만 의뢰인의 동료가 그 글을 보고 의뢰인에게 연락했습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의뢰인이 특정되었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조회수 217회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누구든지 볼 수 있는 공개된 게시판에 올렸다는 사실 자체로 공연성을 충족합니다. 몇 명이 실제로 봤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법원에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형사에서 불기소되었다고 해서 민사상 손해배상책임까지 면제되는 건 아니라고요.
법원이 인정한 것
2022년 12월, 법원은 판결했습니다.
상대방이 제기한 본소청구는 전부 기각했습니다. 상대방과 그 파트너가 사실혼 관계였다는 증명이 부족했습니다. 설사 관계가 있었어도 의뢰인이 알았다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의뢰인의 반소청구는 일부 인정했습니다.
법원은 명예훼손에 대해 명확히 판단했습니다. 인터넷 글을 본 지인이 의뢰인에게 연락했다면, 피해자가 특정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요. 형사에서 불기소되었다고 해서 민사상 손해배상책임이 없는 건 아니라고요.
조회수가 217회에 불과하고 댓글이 없다는 검찰의 불기소 이유는 사족에 불과하다고 봤습니다. 공개된 게시판에 올렸다는 사실만으로 공연성은 인정된다고요.
주거침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함께 온 사람만 형사처벌을 받았지만, 상대방도 두 차례나 집까지 왔습니다. 민사상 불법행위로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법원은 협박, 주거침입, 명예훼손 모두를 불법행위로 인정하며 상대방에게 500만 원 지급을 명령했습니다.
형사가 안 되면 민사로
이 사건이 보여주는 건 명확합니다.
형사에서 불기소되었다고, 무죄를 받았다고 해서 끝이 아닙니다. 민사소송이라는 다른 길이 있습니다. 형사와 민사는 목적도 다르고, 증명 수준도 다르고, 판단 기준도 다릅니다.
형사에서 처벌받지 않은 행위도 민사에서는 불법행위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함께 범행했지만 나만 처벌받지 않았다고 해서 민사책임까지 없는 건 아닙니다.
중요한 건 포기하지 않는 겁니다.
의뢰인은 형사고소가 불기소되었을 때 좌절했습니다. 하지만 민사소송을 통해 상대방의 불법행위를 인정받았고, 500만 원의 손해배상까지 받았습니다. 상대방이 제기한 3천만 원 손해배상 청구는 전부 기각시켰습니다.
형사가 안 되면 민사로 가면 됩니다. 한 길이 막혔다고 모든 길이 막힌 건 아닙니다.